Archive, Just a thought

독서력과 독서가 가지는 힘에 대한 잡담

사람들은 대개 단순화/도식화 하는 것을 좋아하지요. 쉽게 이해가 되니까요. 가장 흔한 예는 혈액형별로 사람을 나누는 거지요. 저도 재미로 읽기도 합니다만, 실제로 그것을 믿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너무 단순화 해버리는 오류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확대 재생산되어 마치 논리적 근거가 있는 것처럼 비춰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 중 한가지는 문이과 성향입니다. 그리고 문이과 성향에 대한 것 중 독서력에 대한 오해는 정말 심각하고도 유해한 오류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어려서 기계 분해하는 것을 좋아해서 주변에서는 제가 컴퓨터를 좋아한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지요. 반면에 책 중독도 심해서 어딜가나 책을 갖고 다녔습니다. (심지어는 놀러 가는 차 안에서도, 수업시간에도 책에 빠져 지내기도 했습니다.) 책 중독은 부모님의 격려에 의해 점점 더 심각해졌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제가 읽는 책의 종류를 컨트롤하고 싶어하긴 하셨지만, 책 읽는 것을 뭐라고 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저의 이러한 배경 때문에, 이과생들이 전공 외의 책을 안읽는다는 얘기를 듣게 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신기하게도 “이과생이라” 전공과 관련된 책 외에는 잘 안읽는다고 하더군요. 대학 때 컴퓨터과학과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라면 이해가 안가는 논리입니다. 과학이나 공학을 전공해서 다른 책을 안읽는다니요! (아, 전공편향적으로 책을 읽는 경우도 있고, 책을 아예 안읽는 경우도 있지만,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학생들 중 그런 학생은 본 경험이 없습니다.)

지식 전달의 수단 중 아직까지 책을 뛰어 넘는 수단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속도에 맞춰 읽을 수 있고, 이해가 안되면 뒤돌아가서 다시 읽거나, 잠시 멈춰서 스스로 생각하거나, 어떤 부분을 읽다가 잠시 그것과 관련된 다른 부분을 참조하기 위해 앞으로 갔다가 돌아오기에 좋은 것도 책이지요.

그런데 책은 강의와 다르게 수단의 제한을 상당히 많이 받습니다. 책의 가장 주력 수단은 언어고, 보조 수단이어봐야 그림과 도표입니다.

그에 반해 그보다 현실친화적인 강의나 동영상에서의 언어는 강력한 도구이지만, 의사소통의 일부를 담당할 뿐입니다. 책보다 강의나 동영상을 쉽게 볼 수 있는 이유는 언어 이외의 다양한 수단들(몸짓, 성량, 다양한 그림/도표, 움직이는 그림, 체험, 기타 등등)의 도움을 받아 정보를 받는 입장에서 그다지 많은 수고를 하지 않고,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영상이 홍보 수단에 적격인 것이지요.

하지만, 쓰여진 언어로만 정보를 전달하는 책은 독자가 스스로 수많은 도표를 만들어내고, 몸짓과 성량을 상상해내야 하며, 심지어는 어떤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책에 없는 정보를 독자 자신의 수많은 경험에서 이끌어내야 합니다. (어떤 책들은 세월이 지나고 읽으면 전혀 다른 느낌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두뇌를 개발해야 할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요?

아직 초등, 중학생이면서도 책을 읽고 음미하고 그 내용을 상상할 시간도 없도록 학교, 학원, 독서실, 집을 오가는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훈련을 받아야 합니까? 시간이 없으니 독서 훈련 프로그램에 들게 해야겠다구요? 독서 훈련 프로그램에서 어떤 책을 어떻게 읽히는지 잘 모릅니다만, 아마도 학부모님의 입맛에 맞을 (지루한) 책을 읽히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는 군요.

아이를 사랑하는,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아이가 어떤 특정 생각을 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없습니다. 좋은 것을 마련해주고 옆에서 격려해 준 후,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를 믿고 기다리는 겁니다. (네, 선생의 입장에 있는 저도 이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 수 있는지 압니다.)

알을 깨고 나오는 아기새가 안타까워서 알을 대신 깨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만, 더 험하고 힘든 이 세상을 잘 헤쳐 나가기 위한 훈련은 아기새만이 할 수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수안머 연재. 2010. 05. 03]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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